치즈 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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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치즈 맞추기

치즈만큼 빵도 맛이 셉니다. 어느 빵에 어느 치즈를 올려야 서로 잡아먹지 않는지,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빵 기준으로 정리했어요.

빵은 원래 접시였습니다

중세 유럽 식탁에는 접시가 귀했습니다. 그래서 사흘쯤 묵혀 딱딱해진 통밀빵을 넓적하게 잘라 그 위에 음식을 올려 먹었어요. 이걸 트렌처라고 불렀습니다. 국물과 기름을 빵이 다 빨아들이니까 식사가 끝나면 그 빵도 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줬죠. 빵과 치즈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게 우연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애초에 빵은 무언가를 받쳐 들라고 존재했고, 치즈는 그 위에 올리기 가장 좋은 물건이었으니까요.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오래된 습관의 세련된 버전에 가깝습니다.

빵이 주인공이 되면 안 됩니다

향이 강한 빵에 순한 치즈를 올리면 치즈 맛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밋밋한 크래커에 강한 치즈를 올리면 치즈만 남아요. 세기를 서로 비슷하게 맞추는 것이 전부입니다. 헷갈리면 빵을 한 단계 순한 쪽으로 고르세요. 치즈는 돈을 주고 고른 주인공이고 빵은 무대니까, 무대가 화려해서 손해 볼 일이 더 많습니다. 특히 올리브·허브·마늘이 이미 들어간 빵은 어지간한 치즈를 다 덮어버립니다. 그런 빵은 그것만으로 완성된 음식으로 여기는 편이 낫습니다.

바게트 — 어디에나 맞는 기본값

속이 촉촉하고 겉이 바삭한 흰 빵은 치즈 맛을 가리지 않습니다. 밀가루·물·소금·이스트뿐이라 맛이 단정하고, 대신 껍질의 씹는 맛이 부드러운 치즈와 대비를 만들어요. 흰곰팡이 치즈를 얹기에 특히 좋고, 살짝 데우면 향이 한층 올라옵니다. 무엇을 살지 모르겠으면 이걸 사면 됩니다. 요령이 하나 있다면 사선으로 얇게 써는 것. 단면이 넓어져 치즈를 얹기 편하고, 한 조각이 가벼워져 여러 치즈를 맛보기에도 좋습니다.

바게트가 특히 잘 받쳐주는 것들이에요.

사워도우 — 신맛이 기름기를 끊습니다

천연 발효종으로 만든 빵에는 은은한 신맛이 있습니다. 그 산미가 치즈의 기름기를 끊어줘서, 크리미한 치즈를 계속 먹어도 덜 물려요. 숙성 체다처럼 짠맛이 뚜렷한 치즈와도 잘 맞습니다. 다만 신맛이 아주 강한 사워도우라면 산이 강한 염소치즈와는 겹칩니다. 신 것 위에 신 것을 올린 셈이 되거든요. 그럴 때는 고소한 경성 치즈나 크림 같은 치즈로 방향을 바꾸면 균형이 잡힙니다.

그 신맛이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짝입니다.

호밀빵 — 블루치즈의 오랜 짝

호밀은 밀보다 향이 진하고 살짝 쌉쌀합니다. 그래서 짜고 향이 센 치즈를 정면으로 받아내요. 블루치즈와 특히 잘 맞습니다. 요령은 얇게 썰어 살짝 구운 다음 치즈를 아주 조금만 올리는 것입니다. 빵이 두꺼우면 치즈 맛이 묻히고, 치즈를 많이 올리면 짠맛만 남아요. 캐러웨이 씨가 박힌 호밀빵이라면 그 향신료 향까지 계산에 넣어야 하니, 치즈는 오히려 단순한 쪽이 낫습니다.

호밀이 정면으로 받아내는 쪽이에요.

견과와 과일이 든 빵 — 고소한 치즈끼리

호두나 무화과가 든 빵은 그 자체로 단맛과 고소함이 있어 단단한 치즈와 잘 맞습니다. 오래 숙성한 치즈에서 나는 견과 같은 풍미와 방향이 같아요. 이 조합의 좋은 점은 곁들임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잼도 꿀도 견과도 이미 빵 안에 들어 있으니까요. 손님이 갑자기 오는 날 빵 하나와 치즈 하나만 사도 한 접시가 완성됩니다. 무화과가 든 빵에 블루치즈를 올리면 디저트에 가까운 맛이 나는데, 이건 실패가 거의 없는 조합입니다.

빵의 고소함과 방향이 같은 것들입니다.

식빵과 치아바타 — 한국 마트에서 현실적인 선택

동네에서 바게트를 구하기 어려운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식빵은 나쁘지 않은 대안이에요. 다만 국내 식빵은 대체로 설탕과 유지가 들어가 촉촉하고 살짝 답니다. 그래서 순한 치즈끼리 만나면 둘 다 밍밍해져요. 짠맛이 분명한 치즈를 고르고, 반드시 토스트해서 수분을 날리는 편이 낫습니다. 치아바타는 이런 면에서 훨씬 유리합니다. 구멍이 크고 담백해서 치즈를 밀어내지 않고, 반으로 갈라 구우면 바게트에 가까운 역할을 해요.

짠맛이 분명해 밍밍해지지 않는 쪽이에요.

크루아상과 브리오슈 — 버터 위에 버터

버터가 층층이 들어간 빵에 지방이 많은 치즈를 올리면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 조합이 통하는 경우가 하나 있어요. 짠맛이 아주 센 치즈를 얹을 때입니다. 브리오슈처럼 달고 부드러운 빵에 블루치즈를 조금 올리면 그대로 디저트가 됩니다. 크루아상은 반으로 갈라 그뤼에르를 넣고 다시 구우면 프랑스식 크로크무슈에 가까워져요. 요컨대 버터 빵은 그냥 얹어 먹기보다 굽거나 짠맛을 더해 쓰는 편이 낫습니다.

버터 위에 올려도 무너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크래커는 밋밋할수록 좋습니다

크래커의 역할은 맛을 더하는 게 아니라 치즈를 입까지 옮기고 바삭한 대비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허브나 치즈 맛이 이미 들어간 제품은 피하세요. 정작 올릴 치즈와 부딪힙니다. 통밀이나 씨앗이 든 크래커는 고소한 경성 치즈와, 아주 얇고 담백한 크래커는 부드러운 치즈와 맞아요. 소금이 굵게 뿌려진 크래커에 짠 치즈를 올리면 짠맛이 두 배가 되니 이때는 치즈 쪽을 순하게 잡습니다.

굵은 크래커와 얇은 크래커에 각각 맞는 쪽이에요.

두께와 굽기, 이 둘이 승부를 가릅니다

빵은 생각보다 얇게 써는 게 낫습니다. 5~8밀리미터 정도, 한입에 부담 없는 두께면 충분해요. 치즈는 그보다 더 얇게. 빵이 두꺼우면 씹는 내내 밀가루 맛만 남습니다. 구울지 말지는 치즈에 따라 갈립니다. 녹는 치즈나 흰곰팡이 치즈는 살짝 데우면 향이 크게 살아나고, 신선한 치즈나 산이 강한 염소치즈는 차가운 상태의 산뜻함이 매력이라 굽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구울 때는 치즈를 올리기 전에 빵만 먼저 굽고, 뜨거운 빵 위에 치즈를 올려 남은 열로 살짝 녹이는 방법이 가장 실패가 적습니다.

빵과 치즈만으로 한 끼가 되려면

영국에는 플라우먼스 런치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빵 한 덩이, 치즈 한 조각, 피클 한 숟갈, 그리고 맥주. 농부의 오래된 점심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 이름은 1957년에 치즈 판매를 늘리려던 홍보 단체가 만든 말이에요. 전쟁 뒤 배급이 풀리자 치즈를 더 팔아야 했거든요. 그런데도 이 구성이 70년 가까이 살아남은 건 실제로 잘 맞기 때문입니다. 기름진 치즈, 담백한 빵, 그리고 그 사이를 끊어주는 신맛. 집에서 치즈로 한 끼를 때울 때도 이 세 가지만 갖추면 됩니다. 피클이 없으면 오이지나 장아찌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한 끼를 이루는 치즈예요.